2023년은 경북의대 전신인 대구의학강습소로부터 개교 100주년이 되는 해다. 경북의대는 한 세기 동안 훌륭한 의료인과 의학자를 배출한 한국의 대표적인 명문 의학 교육 기관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지금까지 배출된 9000여명의 졸업 동문은 환자 진료 및 의학 연구에 매진해 국내외 의료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에 따라 경북의대는 2023년 8월 27일부터 9월 3일까지 100주년 기념주간으로 정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메디게이트뉴스는 경북의대 100주년 기념사업 준비위원회와 함께 지나온 100년을 기념하고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릴레이 칼럼을 게재한다.
경북의대가 역사적인 개교 100주년을 맞았다. 6.25 전쟁 중이던 1951년에 경북의대를 입학했으니, 경북의대 역사 100년 중 72년을 함께한 셈이다.
경북의대와 인연을 맺게 된 얘기로 내 칼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내 소개를 하겠다.
1. 자기 소개
1) 성명 : 노영하(盧英夏), 호(號) : 지헌(芝軒)
2) 1930년 경북 선산 생 (만 92세)
3) 1957년 경북의대 25회 졸업
4) 전 대구동산기독병원(현 계명대 동산의료원) 산부인과장
5) 전 노영하산부인과의원장
6) 전 경북테니스협회장
7) 전 한국사진작가협회 대구시지회장
8) 전 한국예총 대구지회장
9) 전 대구문화원장 및 중구문화원장
10) 전 대구광역시교육위원회 의장
11) 현 성심요양병원 산부인과장
2. 경북의대와의 인연
6.25 전쟁 전 대구의 계성중학교(그 당시는 중학교가 6년제) 다닐 때 원래는 서울대 정치학과를 지망했었다. 그러다 경북의대에 입학하게 된 사연이 있다.
1) 학도병으로 6.25 전쟁 참전
대구의 계성중학교 6학년(지금으로 치면 고3) 때 6.25 전쟁이 발발하고 2학기 때 학도병으로 참전했다. 경북중학교 뒤 커다란 제사공장이 있던 곳에 400~500명이 모여 서 있는데, 갑자기 공장문이 열리면서 빵빵 소리를 내며 미군 지프차가 들어왔다. 미군 제1기갑사단 대위가 지프차에서 내리더니 “Who can speak English?”라고 외쳤다. 그때 경북중학교(지금의 경북고등학교)에 다니던 외사촌 형이 “너도 영어 할 줄 알잖아?” 라며 내 손을 같이 들었다. 영어로 대화한 후 다른 미군 대위가 영어로 “타라”고 해서 지프차에 탄 후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가서 한 일은 낙동강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인민군 병사들을 취조할 때 통역이었다.
통역이 끝난 후에도 미군이 그냥 있으라고 해서 거기 조금 있다가, 갑자기 인천상륙작전이 있어서 거기서 서울을 통해 이북까지 가게 됐다. 10월19일에 동평양까지 올라갔다. 동평양의 사범전문학교에 들어가니 스탈린과 김일성 초상화가 크게 붙어 있었다. 그 공장에 있던 다른 학도병들은 다수가 낙동강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들었다. 나는 운 좋게 미군을 따라다녀서 비교적 안전한 편이었고 전투를 직접 하지는 않았다.
나는 중학생 때 아르바이트로 사진을 찍었다. 철도청 공무원으로 계시던 아버지께서 내가 돌도 되기 전에 갑자기 돌아가셔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했다. 그래서 난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의 사정을 잘 안다. 그것이 나중에 어려운 사람들을 돕게 된 계기가 됐다. 누님은 결혼해서 대구 달성공원 근처에 살았는데 학창 시절 누님 댁에 얹혀 살았다. 누님이 아들만 8명인데 그중 3명이 의사이고 2명은 경북의대를 졸업했다. 43회 졸업 최시호(전 영남의대 성형외과 교수, 최시호 성형외과의원장)와 47회 졸업 최광호(전 청계정형외과의원장)이다.
달성공원 앞에 달성사진관이 있었는데 거기서 사진 현상 인화를 하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사진관 주인이 사진기만 있으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권유해서, 어렵게 산 라이카 사진기로 전교생들의 명찰 사진을 찍어주고 학비를 벌었다. 내가 계성중학교에 사진부를 창설했다. 또한 계성중학교 정구부원으로서 정구 선수로 활동하며 장학금을 받았다. 학비를 벌기 위해 했던 사진과 테니스가 내 평생의 취미가 됐다. 6.25 전쟁 때 평양까지 진격하면서 사진기로 전투 과정을 많이 찍었다. 인천상륙작전부터 그 이후 북진 과정을 모두 사진으로 찍었다. 평양 시내 모습도 사진을 많이 찍었다. 아쉬운 건 1.4 후퇴 때 갑자기 미군이 차에 타라고 해서 탔는데 바로 대구 인근 문경까지 내려와 버렸다. 급하게 몸만 차에 타라고 해서 그 사진기와 소중한 필름들을 가지고 오지 못한 것이다. 그 필름들을 가지고 왔다면 귀중한 역사적 자료들이 됐을 것이다.
2) 내 인생을 바꿔준 휴가
미군 부대에 있다가 부대장이 집에 휴가를 한번 가라고 해서 휴가를 받아서 집에 왔다. 휴가라고 하지만 사실 나는 군번도 없었고 정식 군인도 아니었다. 그때 친구들을 만났는데 곧 대구 의과대학, 사범대학, 농과대학 세 군데 입학시험이 있는데 거기에 들어가면 징집이 연기된다는 말을 듣고 의과대학 시험을 쳐서 합격해서 경북의대에 입학하게 됐다.
3. 경북의대 다닐 때 기억 나는 일화들
1) 경북의대 해부학교실 김필수 교수 일화 1
작년 가을에 큰 아들(노형균, 경북의대 59회 졸업, 이비인후과 전문의)과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다가 어떤 해부학 용어가 떠올랐는데 우리말로 뭔지 아들한테 물어본 적이 있다. 의대 다닐 때 암기했던 ‘aperta interna canaliculi nervi petrosi superficialis minoris’이다. 말로 하니 너무 길어서 아들은 적어서 보여달라고 했다. 보여주자 아들은 눈이 동그라지면서 “어떻게 그때 공부하신 걸 아직까지도 기억하시고 계세요?”라고 물었다. 나는 웃으면서 그걸 여태 기억할 수밖에 없는 일화를 들려주었다.
그 당시 경북의대에 전국적으로 유명한 김필수 해부학 교수가 있었는데 주로 해부학에서 낙제가 많았기 때문에 의대생들이 해부학을 가장 신경 써서 공부했다. 매우 똑똑하고 공부를 잘한 의대 2년 선배(전원상, 경북의대 23회 졸업, 작고)가 있었는데, 그 선배가 김필수 교수 앞에서 구두시험을 보고 있었다. ‘aperta interna canaliculi nervi petrosi superficialis’ 까지는 대답했는데 마지막이 minoris인지 majoris인지 몰라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김필수 교수가 마지막이 뭐냐고 물으니 긴장한 나머지 “모르게타리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김필수 교수는 웃으며 “합격!”을 외쳤다고 한다. 그 얘기가 인구에 회자 되며 전체 의대생들이 다 그 해부학 용어를 외웠고 나도 외웠다. 그래서 그 해부학 용어가 평생,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2) 경북의대 해부학교실 김필수 교수 일화 2
김필수 교수와 관련해서 또 한 가지 기억나는 일화는 어느 의대생이 해부학에서 김필수 교수로부터 낙제점을 받아 유급할 지경에 처했다. 그 의대생은 김필수 교수 집 앞에 자리를 깔아놓고 기다리고 있다가 김필수 교수가 집에서 나오자 “교수님. 저는 이번에 해부학에서 낙제점을 받아 유급하면 자살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니 김필수 교수가 한 말이 “그래, 잘 생각했네. 자네가 죽으면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자네가 살면 많은 사람들이 죽네.” 물론 그 의대생은 유급을 했지만 자살하지 않았고 결국 졸업을 하지는 못했다.
3) 생리학교실원
나는 의대생 생리학교실원으로 있으면서 후에 생리학교실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당시 주영은 교수(경북의대 17회 졸업, 생리학교실, 작고)가 있을 때였다. 생리학교실에 남아 교수가 되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임상을 택했다.
4. 길었던 군의관 복무와 제대를 위한 국회의원 출마
경북의대 졸업 후 군의관으로 군복무를 했다. 전방에 있으면 3년 만에 제대를 시켜준다고 해서 전방에서 3년을 근무했는데, 당시 군의관이 부족하다며 제대를 시켜주지 않았다. 대신 후방으로 가라 해서 온 곳이 밀양 15육군병원이었다. 그때 안영모 대위(서울의대 졸업, 안철수 국회의원의 아버지)와 같은 병원에 근무하면서 집도 바로 옆에 있어서 친하게 지냈다. 내 아내와 안 대위의 부인도 동갑이고 이화여대 기숙사에 4년간 같이 있었던 친구인지라 두 내외가 무척 친하게 지냈다. 내 딸과 안철수도 동갑이라 어릴 때 옆집에 살면서 소꿉놀이를 같이하곤 했다.
안영모는 사람이 참 좋고 인품이 훌륭했다. 장난도 많이 치고 놀려먹기도 많이 했다. 만기가 훨씬 지나고도 제대를 시켜주지 않자 육군병원에 있던 군의관들이 꾀를 내었다. 군복을 벗을 수 있는 묘수가 있었다. 바로 국회의원 출마였다. 공직자(군인 포함)는 법적으로 국회의원이나 시장 같은 공직선거에 출마할 수 없으므로, 국회의원에 출마하기 전에 공직을 사직해야만 했다. 밀양 15육군병원에 있던 50명 넘는 군의관들 모두가 제대를 하려고 출마를 했다. 병원장이 “당신들 다 나가면 병원 누가 보라고 다 나가냐?”고 하자 우리는 “원장님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가 혹시 당선이라도 되면 원장님 대령에서 장군으로 진급도 시켜드릴 수 있습니다”.
병원장은 모두 그만둬 버리면 어떡하냐며 말렸지만, 군의관들은 만기가 한참 지났고 할 만큼 했다면서 “원장님, 수고하세요”라고 말하고 웃으며 병원을 떠났다. 그런데 얼마 후 5.16이 일어나 정해진 기한까지 원대복귀 하지 않으면 총살형이란 통지를 받았다. 군복과 군화도 다 버린 후여서 대구 교동시장에 가서 부랴부랴 돈을 주고 군복과 군화를 사서 원대복귀를 했다. 병원장은 병원 문 앞에 서서 원대복귀 하는 군의관들에게 “꼴 좋시다”라며 웃었고 우리는 풀이 죽어 인사하고 군복을 입은 채 육군병원으로 들어갔다. 군의관을 7년 가까이 하고서야 제대를 할 수 있었다.
5. 산부인과 전문의
제대 후 대구동산기독병원(현 계명대 동산의료원) 산부인과에서 레지던트를 한 후 전문의 시험을 쳤다. 세브란스에서 수련 후 나와 같이 산부인과 전문의 시험을 응시한 중학교 친구가 있었다. 걱정이 되었는지 손을 써서 자리 배치를 내 바로 뒤로 해놓았다. 시험을 치고 있는데 바로 뒤에 있던 그 친구가 등을 쿡쿡 찌르더니 “왜 뒷장은 안 적냐?”라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시험지 뒷장을 보니 거기에도 문제가 있었다. 나는 앞장에만 문제가 있고 뒷장은 백지인 줄 알고 다 푼 걸로 알고 시험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시간 안에 답을 적을 수 있었고, 친구 덕분에 무사히 전문의 자격시험을 잘 치를 수 있었다.
이후 대구동산기독병원 산부인과장으로 근무하다가 1972년에 노영하산부인과의원을 개원했다. 개원 초기에 특별히 기억 나는 일화가 있다. 바로 ‘경산의 계란장수 아주머니’였다. 개원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나이가 서른대여섯 살 정도 돼 보이고 집이 경산인데, 외래에서 진료 후 수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환자가 진료실에서 나간 후 화장실을 가려고 원장실 문을 열고 나가니 그 환자가 대기실에 앉아 울고 있었다. 간호원을 불러 왜 우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수술을 해야 한다는데 돈이 없어서라고 했다. 다른 병원도 두 군데를 다녀왔는데 모두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고, 현금이 없으면 수술이 안 된다는 말을 들어서 여기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해서 울고 있었다고 했다.
그 당시는 전국민 의료보험이 실시되기 전이었다. 나는 간호원한테 환자를 진료실로 들어오게 하라고 했다. 수술비 걱정 말라 하고 수술을 했다. 나중에 퇴원하는데 계란 장사를 했던 환자는 계란을 한가득 담은 큰 대야를 가지고 와서 놓고 가려고 했다. 내가 환자에게 “아주머니, 이거는 왜 안 가져갑니까?”라고 했더니 환자는 깜짝 놀라며 뒤돌아봤고 아마 돈 달라고 할까 봐 겁을 먹은 것 같았다. “돈도 없다면서 계란 팔아서 그 돈으로 장사를 더 잘해서 생활을 유지해야죠”라며 계란을 갖고 가시라고 했다. 환자는 “어떻게 이 은혜를 갚아야 할지”라고 말했다. “나중에 여유가 생겼을 때 없는 사람을 도우면 그게 나한테 갚는 것과 마찬가지예요.”라고 말했다. 환자는 울면서 고맙다고 말하고 계란을 가지고 갔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 “원장님, 경산의 계란 장사하는 아주머니 압니까?” “아, 그 사람이 여기 와서 진찰하고 치료받았는데 정말 잘한다고.” 이런 환자들이 하루에도 몇 명이 왔다. 그 당시는 지금처럼 계란을 마트에서 파는 게 아니라 계란 장수들이 골목을 누비며 팔았다. 경산뿐만 아니라 대구 전역을 다니며 계란을 팔면서 ”동산병원 산부인과 과장하다 어디에 개원했는데 그렇게 실력도 좋고 친절하게 설명도 잘해주고 다른 병원에서 수술 안 되는 걸 수술해서 잘 해결됐다.“고 소문을 내고 다닌 것이다. 이후로도 ‘경산의 계란 장수 아주머니’ 소개로 왔다는 환자들이 많았고, 그 환자들이 또 다른 환자들을 소개했다. 그 환자 수술비와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진료비가 그 환자로 인해 들어왔다.
고등학교 때 내 의원에 환자로 왔다가 형편이 어려워서 수술 못 할 걸 무료로 수술해주고 다른 과 질환에 대해서도 다른 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해준 환자가 있다. 수십 년이 지나 할머니가 된 지금도 내가 근무하는 병원으로 안부 전화가 온다.
6. 자선과 기부
1) 장애인 부모를 둔 경북대 의예과 합격생의 등록금 대납
큰아들 형균이가 경북대병원에서 이비인후과 레지던트를 할 때였다. 식탁에 같이 앉아있다가 ”아버지 이것 좀 보세요.“ 라 말하며 지역 신문에 난 기사를 보여주었다. 부모가 모두 장애인인데 경북대 의예과에 합격을 했는데 등록이 내일 모레인데 등록금이 없어 입학을 못 할 딱한 처지라는 기사였다. 형균이는 ”부모가 다 장애인인데 경북의대에 합격할 정도면 우수하고 성실할 것이고 그런 사람이 의사가 되면 환자들에게도 잘하지 않겠어요? 제가 그동안 레지던트 하면서 월급 모아놓은 게 있는데 그걸로 등록금을 내주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그런 말을 하는 아들이 가상하기도 하고, 순간 지난날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6.25 전쟁 중에 학도병으로 갔다가 휴가를 받아 나와서 알게 된 경북의대 입학시험. 짧은 기간 공부를 열심히 해서 합격했는데 입학금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고향인 선산으로 갔다. 그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안 계셔서 큰아버지에게 부탁을 했다. 큰아버지는 논 몇백 마지기를 가지고 있는 부자였고, 일정시대에 축음기까지 있던 분이었다. 입학금 얘기를 하니 잘라서 ‘돈이 없다’는 거였다.
”그러면 아버지 돌아가시고 제 앞으로 있는 땅을 처분해서 그거를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다는 아니라도 입학금만이라도 대 달라고 했는데 지금 돈이 없어 안 된다는 거였다. 등록을 해서 입학만 하면 그 다음은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안 된다고 하니 군에 가서 죽으나 여기서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낙동강 물에 빠져 죽으려 하다가 주위의 만류로 그만두었던 일이 생각났다.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그럴 수는 없었다. 입학금은 누님이 집을 팔아서라도 마련하겠다고 하셨다. 집은 팔지 않고 이리저리해서 겨우 입학금을 마련했었다. 그래서 그 장애인 부모를 둔 경북의대 합격생의 마음이 헤아려졌다.
큰아들에게 ”내가 할게“라고 말하고 바로 경북대 총장에게 전화를 해서 그 학생 등록금을 대납할 테니 입학을 시키라고 말했다. 그 후 경북대 총장과 만났고 경북대에서는 그 학생에게 기숙사 등 다른 편의까지 제공하기로 했다.
2) 큰아들 중학교 급우 학비 지원
형균이가 사대부중 다닐 때, 급우가 가정 형편으로 학교를 못 다닐 처지에 있다고 도와주면 좋겠다고 해서 그 학생과 그 형까지 중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비를 대준 적이 있다.
3) 모교인 선산초등학교에 지헌 도서관 건립
모교인 선산초등학교에는 내 호를 딴 지헌 도서관을 지어주었다.
4) 경북의대를 위한 기부
하루는 환자를 보고 있는데, 경북의대 이죽내 학장(경북의대 33회 졸업, 정신과)이 찾아와서 ”선배님, 오늘 저희 집에서 식사 한번 하십시다“ 그러는데 그때 워낙 바쁠 때라 의원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얘기를 했다. ”선배님, 세브란스나 서울의대 학생들은 시청각 기자재가 다 돼 있는 강의실에서 컴퓨터도 하고 인터넷도 하고 미국하고도 연결해서 강의도 하는데 우리는 지금 할려고 하니까 돈이 없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나는 ”왜, 동창회가 있지 않습니까?“ ”아이고, 동창회 간섭만 하고 돈은 안 냅니다.“ 지금은 의대 동창회가 기부도 많이 하고 의대를 많이 도와주는 것 같던데 그때는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내가 모교인 선산초등학교에도 도서관을 지어주고, 사재를 출연해서 내 호를 딴 대구의 초중고등학생 교육감배 테니스 대회인 지헌테니스대회도 개최하고 여기저기 장학금 수여와 기부를 하고 하니 아마 누군가가 나한테 가서 이야기를 하면 통하지 않겠느냐 말을 한 것 같았다.
그래서 이죽내 학장에게 말했다. ”제가 강의실을 서울하고 똑같이 지을 수 있게 돈이 얼마가 들던지 하겠습니다.“
그 후에 의대교수회의에서 고맙다고 강의실 앞에 내 흉상을 세워주자고 결의가 돼서 부끄럽게도 내 흉상이 만들어졌다.
의대에 기부를 한 건 20년도 더 된 오래전의 일이다. 2015년에 내가 근무하고 있는 성심요양병원으로 경북의대 학생들이 감사 편지를 보내왔다. 경북의대 김인겸 교수(경북의대 54회 졸업, 약리학교실)가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강의실 앞의 흉상이 누구인지 아냐고 묻고, 바로 지금 강의 듣고 있는 강의실을 지어 준 의대 선배라는 말을 했더니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감사 편지를 보낸 것이었다. 그런 감사 인사를 받으려고 기부를 한 건 아니지만, 기분이 좋고 편지를 보내준 학생들이 고마웠다. 받은 편지를 큰아들 형균이한테 보여줬더니 ”교수님과 학생들과의 식사 자리를 만들어볼까요?“ 하고 묻길래 흔쾌히 좋다고 했다. 김인겸 교수와 큰아들 그리고 감사 편지를 보내준 학생들이 모두 모여 식사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자리는 그 뒤로도 코로나19 팬데믹 이전까지 매년 이어졌다.
7. 문화, 예술, 체육 봉사 활동
1) 한국사진작가협회 대구시지부장
2) 또 하나의 봉사, 예총회장
한국사진작가협회 대구시지부장을 거쳐 1988년에 예총 대구지회장이 되었다. 의사 출신으로는 처음이었다. 그 해에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 대구에 내려와서 노태우 대통령이 집에서 만나자고 해서 갔을 때, 대구에 문화예술회관이 필요하다고 말했고 노 대통령이 수락해서 지어진 것이 지금 두류공원에 있는 대구문화예술회관이다.
3) 경북테니스협회장
4) 지헌배(芝軒盃)테니스대회
지헌(芝軒)은 내 호(號)로서 장인어른께서 지어 주셨다. 장인어른(최해태, 경성제대 법학부 졸업. 전 청구대학장, 영남대학교 법대학장, 대학원장, 1987년 작고)의 큰형님이 청구대학을 설립하셨고 청구대학은 후에 대구대학과 합병하여 영남대학교가 되었다.
지헌배테니스대회는 내가 경북(대구를 포함)테니스협회장을 할 때 내 사재를 출연해서 만든 대구 초중고등학교 대항 교육감상의 테니스대회이다. 처음엔 출연금 이자만으로 대회운영이 가능했지만 얼마 후부터는 매년 천만 원 정도의 운영비를 내가 지원해서 치러지게 되었다.
현 대구테니스협회장은 큰아들 형균이와 경북의대 동기인 백승희 회장(경북의대 59회 졸업, 사랑모아마취통증의학과의원장)이다.
8. 교육 봉사 활동
1) 대구광역시교육위원회 의장
의사로서는 교육위원회 의장을 처음으로 한 것으로 안다.
내가 의장을 할 때 공립도서관장에 사서직도 임용될 수 있도록 했다.
9. 결어
경북의대 100주년을 기념하여 칼럼을 쓰면서, 처음엔 경북의대와의 인연으로 시작한 칼럼이 쓰다 보니 내 자서전의 축약판이 되어버렸다. 72년을 함께 했으니 나도 경북의대 역사의 한 부분이고 경북의대도 내 개인사의 중요한 일부분이다.
경북의대는 나를 의사로 만들어주었고 환자를 돌보고 고통을 덜어주는 숭고한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감사할 따름이다.
90년을 넘게 살았는데 지금 와 생각하니 남는 건 남에게 베푼 것, 나누어준 것이다. 더 베풀지 못한 게 아쉽다. 남은 인생도 더 베풀다 가고 싶다.
마지막으로 모교인 자랑스러운 경북의대의 100주년을 축하하며, 경북의대의 앞날에 무궁한 발전과 후배님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면서 졸고를 마무리한다.
가르쳐 주신 교수님들, 같이 공부해준 교우들, 선후배님들,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신 모든 분들, 그리고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 환자들에게 감사한다. 모교인 경북의대가 향후 100년 후에도 자랑스럽게 우뚝 서길 기원한다.
댓글보기(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