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 교수·윤건호 교수·허대석 단장 '근거∙기술중심→환자∙가치중심' 의료 패러다임 변화 제안
[메디게이트뉴스 박민식 기자] 우리나라의 의료수준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각종 의료관련 지표들에서 볼 수 있듯 세계적으로 내로라 하는 수준까지 성장했다. 하지만 붕괴된 의료전달체계와 3분 진료로 대표되는 짧은 진료 시간 탓에 진정 환자들을 위한, 환자들이 원하는 의료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은 아직 부족하다는 지적들도 나온다.
15일 대한민국의학한림원, 한국보건의료연구원(NECA), 환자중심의료기술최적화연구사업단(PACEN) 주최로 열린 심포지엄에서는 기술중심에서 환자∙가치 중심으로 보건의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기 위한 전문가들의 토론이 벌어졌다.
"계층∙지역 간 건강 격차 문제 여전...지역완결형 의료체계로 가치중심 의료 실현"
서울의대 의료관리학교실 김윤 교수는 ‘가치기반의료체계 구축방안’을 주제로 첫 번째 연자로 나섰다. 김 교수는 우리나라 의료시스템의 계층∙지역 간 격차 문제를 지적하며 해결책으로 지역완결형 의료체계를 갖출 것을 제안했다.
그는 의료 분야에서 가치는 투입된 비용을 분모로 두고 그에 따른 환자들의 건강 개선 결과를 분자로 계산한 것이라고 정의했다. 이 같은 개념에 근거할 때 현재 우리나라의 의료시스템은 여전히 아쉬운 점이 많다는 것이 김 교수의 지적이다.
우선 전체 국민들의 평균적인 건강수준은 과거 대비 향상됐지만 사회경제적 계층간, 지역간의 건강 격차 문제는 여전하거나 오히려 퇴보했다는 점을 짚었다.
실제 2004년과 80.97세와 74.73세이던 소득 상위 20%와 소득 하위 20%간 기대수명은 2017년 각각 85.8세와 79.32세로 높아졌다. 하지만 두 계층간 기대수명 격차는 6.24세에서 6.48세로 오히려 더 벌어졌다.
우리나라를 55개 중진료권으로 나눠 입원환자중증도보정사망비(1.9→2.1), 치료가능사망률(1.6→1.6), 중증도보정재입원비(1.5→1.4) 등의 수치가 가장 높은 지역과 낮은 지역을 비교한 결과에서도, 지역간 격차가 과거와 유사하거나 더 악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김 교수는 우리나라는 건강보험의 보장률이 낮고, 의료비 문제로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비율도 2019년 기준 7.5%로 OECD 평균 5.4%에 비해 높다는 점도 지적했다. 이에 그간 정부는 보장성 강화를 위해 많은 비용을 투자해왔지만 이번 정부 역시 목표치였던 70% 보장률 달성에 실패한 상황이다.
이 같은 격차는 투입되는 절대적 비용이 적기 때문은 아니라는 게 김 교수의 분석이다. GDP 수준을 보정해 OECD 평균과 비교한 결과, GDP중 의료비는 106%로 OECD 평균에 비해 높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이러한 데이터를 근거로 “가치라는 것이 단순히 평균의 향상이 아닌 격차를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건강 불평등을 해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도시에 좋은 의료자원이 대부분 집중돼있는 현 상황에서는 보장성 강화만으로 지역간 건강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의료취약지에 공공의료 기반의 대형 종합병원을 늘려가는 방식으로 전체 시스템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분절적 의료가 문제...원격의료∙데이터 등 활용해 일차의료 중심으로 가야"
서울성모병원 내분비내과 윤건호 교수(의학한림원 원격의료특별연구위원회 위원장)는 고령화와 만성질환자 증가 등에 따른 의료비 급증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데이터를 활용한 일차의료 중심의 ‘커넥티드 케어’(connected care)를 제안했다.
윤 교수는 2009년부터 2017년까지의 서울지역 당뇨병 유병률 자료를 제시하며 소득수준에 따른 건강 격차 문제를 언급했다. 강남 지역 대비 소득 수준이 낮은 강북 지역이 당뇨병 유병률이 더 높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윤 교수는 “경제 격차가 건강 격차를 유발하고 있는데 이런 문제가 의료기관이 많은 서울시에서 벌어지고 있다”며 “지금의 분절돼 있는 중증진료 대형병원 위주의 의료시스템을 일차의료 중심의 주치의제 형태로 변화시켜야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차의료기관이 현재는 이런 역할을 할 여건이 부족한데 어떤 지원을 해줄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사용이 크게 늘어난 원격의료를 어떤 방식으로 수용할지에 대한 논의가 부족하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윤 교수는 “우리 손 안에 이미 의료를 혁신적으로 바꿀 기술은 있지만 업무흐름이나 여러 경제적 인센티브가 대면에만 집중돼 있다는 문제가 있다. 이 시스템이 바뀌지 않고서는 의료시스템도 바뀔 수 없다”며 “기존 인센티브 시스템의 가치기반으로의 혁신이 필수적”이라고 했다.
의료 데이터의 적극적 유통과 활용도 제안했다. 지금까지는 치료 과정에서 의사가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면 앞으로는 환자도 자신의 데이터를 갖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질병을 관리해나갈 수 있도록 의사가 가이드로서의 역할을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윤 교수는 이 같은 원격의료와 의료데이터 시스템을 일정 정도 현장에 적용하고 있는 사례로 일차의료 만성질환관리 시범사업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이런 사업을 고도화하고 미비점을 보완하며 일차의료기관들의 자원을 확충하는 것이 환자∙가치 중심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방안이 될 거라고 내다봤다.
윤 교수는 “앞으로 의료 수요 증가에 따른 의료비가 폭증이 예상되는데, 이런 수요를 충분히 채워주면서 감당 가능한 의료비용 내에서 새로운 시스템을 정립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이어 “그 중 하나가 커넥티드 케어다. 병원에서 이뤄지는 단절적 진료가 아니라 환자와 의료기관, 주치의가 늘 연결돼 있는 시스템 내에서 진료하는게 형태가 향후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며 “그걸 위한 인프라 구축과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근거 기반 의료만으론 한계...공익적 임상연구로 환자중심 의료∙재정절감 가능"
환자중심의료기술최적화연구사업단 허대석 단장은 환자중심 의료를 위한 공익적 임상연구의 필요성에 대해 역설했다.
환자중심 의료기술 최적화 연구사업은 보건복지부 지원으로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이 주관하는 국가지원 임상연구 사업이다. 인∙허가 후 임상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의료기술 간 비교효과성 등의 근거를 생성하고 정책과 연계해 국민건강 향상 및 지속가능한 보건의료체계를 실현하는 것을 목표료 하고 있다.
허 단장은 신약개발 등의 과정에서 이뤄지는 의뢰자주도 임상시험(SIT, sponsor initiated trial) 대비 인허가 후 연구자주도 임상시험(IIT, investigator initiated trial) 형태로 진행되는 공익적 임상연구에 대한 투자가 극히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실제 SIT는 지난 15년간 크게 발전했다. 허가건수만 해도 2004년 136건에서 2020년 799건으로 6배 가까이 증가했고, 예산 규모도 2019년 CRO(임상시험수탁기관) 매출기준으로 5220억원에 달한다. 반면 공익적 임상연구는 기껏해야 200억~300억원 수준에 그친다.
허 단장은 과학적 근거 축적에만 집중한 현행 연구가 가진 한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첫 번째가 비용 문제다. 환자들은 의료기술 발전과 신약개발로 낮은 비용과 높은 효과를 얻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오히려 비용 부담이 더 크게 늘었다는 것이다.
삶의질 측면에서도 기존 근거중심 연구가 놓치고 있는 부분들이 있단 지적이다. 가령 여러가지 만성질환을 가진채 혼자 살고있는 고령자의 경우 근거 기반으로 개발된10여개의 약을 매일 복용하고 있지만 정작 삶의질 측면에서는 만족스럽지 않을 수 있다. 이 같은 문제는 무작위 대조군연구(RCT)로 근거만 축적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것이다.
허 단장은 “우리나라의 경우 총 진료비가 2014년 대비 2020년에 56%가 증가했지만 보장률은 60%대에서 정체 상태인데 이것을 기술 중심 의료료 접근해 해결 가능할지를 생각해봐야 한다”며 “우리와 비슷한 문제를 가진 다른 나라들은 여러 시도를 하고 있다”고 했다.
실제 영국, 미국 등이 공익적 임상연구에 투자하는 금액도 연 200억원가량인 우리나라와는 비교가 어려운 수준이다. 영국 국립보건연구원(NHIR)은 국민보건서비스(NHS)의 예산 1% 이상(약 1조5000억원 이상)을, 미국의 환자중심성과연구소(PCORI)는 2019년 기준 4352억원의 예산을 공익적 임상연구에 쓰고 있다.
이들 나라들이 막대한 재정을 공익적 임상연구에 투입하는 것은 공익적 임상연구가 그 보다 더 큰 비용절감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이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과학기술부가 예산 심의를 하다보니 예산을 따내는 과정에서부터 쉽지 않다는 지적이다.
허 단장은 “과기부에선 공익적 임상연구의 필요성 자체에 대해 의문을 표한다. 미국이나 영국처럼 건강보험 재정에서 큰 부분이 지원되는 게 바람직하다”며 “실제로 현장에서 보면 낭비 요인이 정말 많은데 10억만 넘어와도 1년에 100억 이상을 절감할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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