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의 지배력이 비대해지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전문 영역인 의사의 역할도 축소될 것이라는 일부 전망과는 달리 급속히 분화되는 사회 현상과 고령화 등으로 의사 역할이 커지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은 의과대학이나 전공의 교육 현장에서 이렇다 할 뚜렷한 변화를 쉽게 감지하기 어렵다. 우리나라는 최근 전공의 근무시간에 대한 제한을 법제화한 것을 빼고는 전공의 교육이 60년간 무변화로 지탱해 왔다는 사실에도 무감각해 보인다. 되레 각급 수련병원의 입장에서는 변화의 대처로 전공의 수를 늘려야 한다는 단세포식 처방도 눈에 들어온다.
새로운 시대를 맞아 전공의들은 새로운 시대에 대비하기 위한 교육적 변화로 직종 간 교육(interprofessional education)을 비롯해 기초와 임상 그리고 의료제도 전반을 아우르는 융, 복합 형태의 통합교육이 필요하다. 또한 의학교육 기관과 병원, 그리고 지역사회 모두를 통합하는 방안도 마련돼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전공의 공통 역량(generic competence)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나친 의료인 통제 사회, 의사 양성 교육은 소홀
의료자본가를 육성할 수 있었던 자유계약 의료에서도 전공의 신분은 매우 취약하고 대우도 좋지 않았다. 이런 열악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전공의 교육이 변하지 않았던 것은 전공의 교육이 끝난 이후에 생기는 경제적 이득이 몇 년 쯤의 고생은 감내할 만한 충분한 명분이 됐기 때문이다.
의과대학 교수의 급여가 낮은 편이다 보니 전공의와 교수는 의국이라는 단위에서 제약회사의 도움과 개원으로 성공한 동문의 지원을 받으며 의국제도를 유지해왔다. 이런 습관으로 인해 아직도 소위 회식기반형 전공의 교육은 리베이트 쌍벌제로 차단막이 형성된 불법 리베이트 대신 불법 ‘입국비’나 ‘당직비 착취’ 형태로 둔갑했고, 일부에서는 의국비로 충당하고 있다는 있어서는 안 될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전문의가 되더라도 자기가 수련 받은 전문 과목으로 지속적 생존이 불가능하고, 전공과목과 실제 개원 시 표방하는 진료과목이 어긋나는 괴리 현상도 당연한(?) 흐름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전문직종이 지니는 의사 고유의 윤리성과 일반인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높은 도덕적 기준을 담보로 한다. 어떤 국가든 어떤 계층에서든 항상 존재하는 극히 일부 의사에 대한 부조리 문제만을 집중 부각시킨다. 마치 의사 전체가 그런 것인양 부정적이고 악의적인 여론 조성을 앞세워 강력한 국가권력을 무기로 옴짝달싹 못하게 의료인 통제를 즐기는(?) 관료주의 사회에 놓여있다.
한 마디로 의사 양성을 위한 정부의 순기능적 정책 지원보다 숨쉬기조차 힘겨운 관제 형태의 가혹한 통제의 고삐를 나날이 옥죄이고 있는 셈이다.
사회적 평등과 정의로운 사회를 주장하는 현 정부 역시 우리나라 의사 양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나 비전은 찾아보기 힘들다. 전공의 교육에 필요한 노동 강도에 따른 적절한 보상과 정책적 지원을 마련해야 되는데, 수련의들에게 지급되는 급여의 주체가 병원이다 보니 결국 이 문제는 의료계의 자체 문제로 귀결된다. 정부가 수가통제에 관한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마당에 이에 상응하는 전공의 교육이나 의과대학에 대한 지원은 ‘나 몰라라’하는 것이다.
전공의에게 석박사 요구 관행 개선하고 토론과 대안제시 교육을
하지만 이제 전공의 교육이 달라져야 한다. 전문의 교육 후 미래의 안정된 보수와 직무환경을 전제로 유지됐던 과거의 취약한 전공의 교육은 이제 방향을 달리해야 한다. 의료계 스스로부터 전공의에 대한 적절한 대우를 마련해줘야 한다.
물론 전공의는 일면 피고용인이고 일면 피교육생의 학생 신분이어서 전문의 수준의 급여는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넉넉지 않은 전공의 급여를 다시 석박사 학위 취득에 필요한 등록금으로 토해내도록 하는 교육 운영 방식은 당장 개선해야 한다. 해당 분야 전문의 자격 취득 위해 수련과정에 몰두하고 있는 모든 전공의들에게 연구를 위한 석박사 과정이 필요한지 고려해야 한다. 만일 석박사 과정이 필요하다면 공적 자금의 지원 방식과 성인으로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기본 급여를 보장해야 마땅하다.
또한 전공의 근무시간의 변화 뿐 만 아니라 전문직 교육에 대한 넓은 인식이 필요한 시점이 됐다. 식민 유산의 잔재라 할 수 있는 의국문화를 통해 임상능력을 배양하는 기형적 시스템에서 시급히 벗어나야 한다. 변화에 대한 요구사항을 단순한 불만 제기나 비판, 비난의 차원을 넘어 이를 구체적 사회 문제화해야 한다. 이를 통해 공식적인 의제화, 토론과 새로운 대안 제시, 그리고 실행을 위한 전략개발 등의 단계를 설정하는 교육도 현재의 전공의 교육과정에 반드시 제도화해서 정착시켜야 한다.
전공의이 의료의 주역이 됐을 때 변화라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며 변화에 대한 끊임없는 대처도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는 능력임을 스스로 인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현대의 의학교육에서는 의과대학 졸업 후 더욱 깊이 있게 발전시키는 것이 자기 전공 분야의 학문과 기술 이외에 전문 직업이 갖춰야 하는 기본 공통 역량이다.
generic competence, 임상전문과목 지식 외에 통합적인 교육 필요성 제기
전공의 공통 역량(generic competence)은 전공의에게 교육, 연구, 관리, 리더십, 의료제도, 의사소통, 직종간교육, 윤리 등 임상 전문과목의 지식과 기술 이외 전문직으로 갖춰야 할 보다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역량을 요구한다. 병원경영을 위해 박한 전공의 급여와 싸구려 교육은 전문직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자구책이 될 수 없다.
전공의 교육에서 ‘generic competence’를 위한 내용은 지난 30년 이상 계속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캐나다를 선두로 미국 등 선진 국가들은 지금도 지속적으로 개발 중이다.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고 점차 세분화해 정밀하게 보완해 나가고 있다. 하지만 수 십 년 동안 무변화로 일관해 온 우리나라 전공의 교육 수준은 현재 선진국들과 한 세대 이상의 큰 격차로 벌어져 있다.
그럼에도 우리 의료계는 첨단 장비를 갖추고 부단한 노력과 연수를 통해 익힌 기술로 세계 최고의 의료수준에 이르렀음을 자타가 인정하고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말레이시아, 두바이, 싱가포르, 인도, 터키, 태국 등도 앞 다투며 자국이 세계 최고 수준이면서 저렴한 진료비를 내세워 의료관광을 내세우고 있다. 이 대목에서 우리나라가 진정 의료선진국인지, 아니면 수입기술 선진국인지를 냉정하게 판단해볼 필요가 있다.
오로지 환자만 열심히 진료하면 충분한 경제적 보상이 따라붙었던 시대는 이제 먼 옛 이야기가 됐다. 잘못돼 있거나 시대에 맞지 않는 왜곡된 의료제도를 바꾸려면 의사들도 이제는 'generic competence'에 대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선배 의사들이 획일적으로 걸어왔던 길과는 다른 다양하면서 폭넓은, 그리고 좀 더 색다른 길을 도전적으로 걸을 수 있어야 한다.
최근에 출간된 21세기 의사양성을 위한 의학교육에 관한 보고서에는 의학교육은 과거의 장인적(expert)기술교육에서 전문직(professional)으로, 그리고 나아가 변화의 주역(changing agent)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바로 우리나라에서 전문직이 갖는 교육의 범위를 다시 한 번 생각게 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암울했던 시기의 해방 노예처럼 교육받은 기성의 교육자 세대가 미래 의료의 주역인 젊은 전공의들에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중세 봉건시대의 구습과 악습들이 그대로 남아 대물림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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