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박민식 기자] 의료전달체계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선 상급종합병원을 중증질환 중심으로 개편하고, 연구·개발 수익도 활용할 수 있게 길을 터줘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고대의대 예방의학교실 정재훈 교수는 10일 서울 강남구 그랜드인터컨티넨탈 파르나스에서 열린 대한병원협회 국제학술대회 KHC 2025에서 ‘상급종합병원과 의료전달체계의 지속가능성’을 주제로 발표했다.
정 교수는 “지금처럼 저렴한 비용으로 질 높은 의료를 누릴 수 있는 제도는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못 박았다. 현재 추세로 증가하는 의료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려면 2060년엔 건강보험 요율이 14%가 되고, 그 경우 직장인 월급의 절반 가량이 건보료와 국민연금으로 나가게 되는데 이는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 때 OECD 평균 이하였던 한국의 GDP 대비 의료비는 어느덧 평균을 넘어섰고,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2040년 무렵엔 직장인 1명이 국민 2명, 2050년경엔 2.5명분의 의료비를 부담해야 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정 교수는 경증 질환에 대한 국민 부담을 어느 정도 늘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 다만 이것만으로 큰 흐름을 막기엔 역부족이라고 내다봤다. 현재 의료비(약제비 제외)에서 경증 질환 관련 비용은 4분의 1에 그친다. 나머지 4분의 3은 중증질환을 담당하는 사실상 상급종합병원, 종합병원에 들어가는 비용인데, 이는 인위적으로 억제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저임금 장시간 근무 '전공의' 이탈…이전 같은 효율성은 불가능
정 교수는 의정 갈등으로 전공의들이 대거 이탈하면서 상급종합병원이 예전과 같은 효율성을 보여주기 힘들어졌다는 점도 지적했다. 실제 의정 갈등 전까지만 해도 동일 질환에 대한 급여 청구를 비교하면 상급종합병원이 종합병원에 비해 되레 8% 정도 청구비가 낮았다. 이를 가능하게 했던 건 저임금 장시간 근로를 이어가던 전공의의 존재였다.
이에 정 교수는 상급종합병원이 대체 가능한 분야는 일정 정도 종합병원으로 넘기고 대체 불가능한 부분에 집중해야 한다고 했다. 또 그것만으로도 병원 운영이 가능하도록 중증의료에 대한 충분한 보상과 연구·개발 수익에 대한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정 교수는 “지금까지 상급종합병원들은 대체 불가능한 분야에 대해 수익이 충분히 보장되지 않았었기 때문에, 대체 가능한 분야에서 수익을 내서 대체 불가능 영역의 손실을 메꾸는 형태였다”며 “그런데 대체 가능 영역을 종합병원으로 넘기게 된다면 그만큼 비는 부분을 보상해줄 정책적 수단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 “이런 점에서 연구개발과 새로운 의료 플랫폼으로서 상급종합병원의 역할이 중요하다. 기존에 연구중심병원 등 여러 가지 정책이 있었지만 정부 R&D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며 “그런 형태가 아니라 제도적 장벽이나 풀어주면서 상급종합병원들이 의료 이외의 수입도 크게 높일 수 있는 방안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물론 중증의료에 대한 충분한 보상은 당연히 뒤따라야 한다. 권역 외상센터나 권역 심뇌혈관센터처럼 기관이나 센터 단위로 지원을 해주면서 기존 지불 제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정 교수는 동시에 정부를 향해 건강보험 요율 인상과 세금 투입도 당부했다. 그는 “지난 정부가 여력이 있을 때 건강보험 요율을 높이거나 세금을 투입하지 않은 부분이 가장 아쉽다”며 “지금처럼 여유가 있을 때 더 많은 재원을 마련해 둬야 한다. 다음 정부에서라도 국고 보조를 늘리거나 비필수의료 분야에서 필수의료 분야로 재원을 전환해주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대목동병원 김한수 병원장, 고대구로병원 신정호 기획실장.
상급종합병원 경영진 "경증환자 비율 실제론 더 높아"
이어진 패널 토론에 참여한 상급종합병원 경영진도 현재 구조에선 상급종합병원이 불가피하게 경증 환자를 볼 수밖에 없다는 점을 토로하며 정 교수의 의견에 힘을 보탰다.
이대목동병원 김한수 병원장은 “환자 비율과 관련한 정부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병원들은 환자를 소위 ‘다듬는다’”며 “데이터상의 비율과 달리 실제론 상급종합병원을 찾는 경증 환자가 상당히 많다”고 했다.
이어 “많은 상급종합병원들이 중환자 진료에 필요하기 때문에 다수의 CT와 MRI를 보유하고 있다”며 “하지만 중증환자가 지불하는 비용만으로는 유지가 안 되니 경증 환자들을 찍어서 중증 환자를 보는 측면이 없지 않다”고 했다.
김 병원장은 “실제 경증환자들이 상급종합병원 대신 1, 2차 병원에서 진료를 받거나 아예 병원을 찾지 않는다면 의료보험 재정뿐 아니라 국민들이 받는 의료서비스에도 지대한 효과가 있을 것”이라며 “보통 감기 환자 1명에 건강보험에서 2만원이 나간다. 하루에 감기 환자 1000명이 병원을 찾지 않으면 2000만원을 아낄 수 있고, 그 비용으로 암환자 1명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산업적 측면에서 바라봤을 때 해결될 부분도 많다. 우리 병원이 직원 6000명에 매출이 약 1조원인데 포트폴리오는 너무 빈약하다”며 “미국처럼 연구, 개발을 통한 수익을 병원이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국내 의료기관들은 여전히 장례식장, 식당에서 수익을 내고 있다”고 덧붙였다.
중증 진료 유리하게 수가 구조 개선해야…효율성 위해선 집중화∙분업화∙대형화
고대구로병원 신정호 기획실장은 국가 차원에선 상급종합병원들이 지금보다 더 집중화, 분업화, 대형화되는 게 효율적일 거라고 제안했다. 다만 지방의료 소멸 문제가 정부의 그런 결정을 주저하게 만드는 요소라고 봤다.
신 실장은 "정부는 지방의료 위기 대한 배려로 집중화, 대형화, 분업화와 거리를 두고 있지만, 과연 20~30년 뒤에도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있을지 의문이다. 재정 효율화를 위해선 불가피한 방향이고 결국 국민들도 그걸 원할 것”이라며 "당장 내가 내는 건보료와 세금이 낮아지는 걸 원하지 눈에 안 보이는 어딘가에 병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결국 그 부분은 환자들의 의료이용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고선 해결이 어렵다. 지금처럼 지역에서 서울에 있는 대형병원으로 올라오는 게 자유로운 상황에선 지역마다 필수적인 걸 다 갖추려고 하는 건 비용이 너무 많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신 실장은 또 “정부가 상급종합병원 구조전환을 시도하고 있는데, 제대로 되려면 병원 경영진이 봤을 때 그 방향이 병원 경영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들어야 한다“며 “상급종합병원이 급성기 환자에만 집중해도 경영상 유리하도록 수가 구조를 바꿔야 한다. 그래야 외래 빈도가 줄고 3분 진료라는 오명도 사라질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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